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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 첫 이별을 기록하며

by 플로브 2026. 9. 7.

나는 그를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그러한 운명이 있지 않은가. 나와 맞지 않는 색의 립스틱, 먹을 때마다 체하는 태음인의 닭고기 같은 존재 말이다. 필연적으로 끌렸지만 나와 다른 상성에 끝끝내 멀리 하게 되는, 그도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우린 운명이었던 것과 동시에 찰나에 종속된 필연이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그렇겠지만, 나는 그를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우리는 기억도 나지 않는 유년 시절을 한 동네에서 보냈다. 2005년, 다섯 살의 내가 서대문구로 이사오기 전까지, 나는 반대편에 떨어진 광진구의 작은 동네에서 자라났다. 그가 살아온 아파트 앞의 한 초등학교, 그리고 그 옆의 빌라에서 나는 짧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언젠가 스무 해 만에 그의 동네를 거닐며 나는 처음으로 그와의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가 5살과 3살일 적, 혹은 그 이전에 유모차에 마주 누워 잠시나마 스쳤을 수 있겠다고. 적어도 태어나고 몇 해 간은 직선 거리 300m 안 팎에서 같은 동네의 숨을 쉬었다고. 그것이 내가 그를 운명으로 여기는 첫 번째 이유이다.
 
둘째, 우리의 첫 만남이 꽤 로맨틱하다(고도 볼 수 있다). 나는 그를 인스타그램으로 처음 보았다. 정확히는 가장 친한 친구의 스토리에 올라온 그를 보았다. 아닌가, 친구와의 영상통화 중 친구 방 벽의 동기 인생네컷이 처음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나는 그를 종종 보았고, 때때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엔 그에게 별 생각이 없었고 한때는 친구의 빌런 동기로 오해하기도 했지만, 사진 속 검은 뿔테 안경을 낀 뽀얀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10월, 그에게서 나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와 처음 만나게 되었다.
 
첫 만남 이야기가 나와 짧게 당시를 회상해 보자면, 그의 첫인상은 내 기대와 사뭇 달랐다. 키가 몹시 크다고 들었는데 170cm인 나에게 기대만큼은 아니었고, 카페 앞 민트색 공중전화 근처서 누군가와 전화하는 모습이 그의 첫 장면이었다. 카페 안 계단을 오르내리며 나를 배려하는 모습엔 매너가 있다고 생각했다. 카페 루프탑에서 그를 정식으로 마주보았을 땐, 솔직히 나와 다른 결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분위기? 당시의 나는 밝고, 호기심이 많으며, 명랑한 여자아이의 느낌을 가지고 있던 데 반해, 그는 굉장히 차분하고 말을 조심하며 때때로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었다. 기대만큼 외모가 내 스타일이지도, 나와 바이브가 어울리지도 않은 느낌에 큰 호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다는 사실이 꽤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빠졌던 것 같다. 그는 집에 가는 버스를 타자마자 연락을 보내왔고 결국 우리는 만나게 되었다.
 
그와의 챕터가 완결되고 모든 내용을 아는 채로 이야기의 첫 장을 넘겨보는 지금, 내게는 수많은 복선이 보인다. 처음에 느낀 결의 다름, 그가 내게 적극적이었던 이유, 연애 초 식당에 마주 앉으면 생겼던 정적까지.
 
모든 이야기가 갈무리된 후 다시 앞 장을 펼쳤을 때 보이는 복선들은 800일 연애의 이별에 대한 정당성 부여일까, 혹은 찰나에 종속된 필연에 대한 클리셰 수집일까. 혹은 모두 같은 말일까.


 
사랑과 연애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과 생각을 담습니다.

소재가 떠오르면, 글 샘에 글을 띄웁니다.